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스트팔렌 조약 (문단 편집) == 체결 == 이 회담에는 [[유럽]]의 16개 나라와 66개의 제국령에서 135명에 달하는 대표를 파견했다. 조약 체결에 참여한 주요 대표는 다음과 같다. * 황제 측 * [[파일:오스트리아 국기.svg|width=28]] [[합스부르크 제국|오스트리아]]: 막시밀리안 폰 운트 추 트라우트만스도르프 백작(Maximilian von und zu Trauttmansdorff, 1584 ~ 1650) * [[파일:스페인 제국 국기.svg|width=28]] [[압스부르고 왕조|스페인]]: 3대 페냐란다 백작 가스파르 데 브라카몬테(Gaspar de Bracamonte, 3rd Count of Peñaranda, 1595 ~ 1676), 남작 앙투안 브룅(Anthoine Brun, 1599-1654) * 그 밖에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의 여러 제후들의 대표자들 * 반(反) 황제 측 * [[파일:프랑스 왕국 국기.svg|width=28]] [[프랑스 왕국|프랑스]]: 발루아롱게빌 공작 앙리 2세 도를레앙(Henri de Valois-Longueville, 1595 ~ 1663) * [[파일:스웨덴 제국 국기.svg|width=28]] [[스웨덴 제국|스웨덴]]: 요한 악셀손 옥센셰르나 백작(Johan Axelsson Oxenstierna af Södermöre, 1611 ~ 1657), 요한 아들러 살비우스(Johan Adler Salvius, 1590 ~ 1652) * [[파일:네덜란드 공화국 국기.svg|width=28]] [[네덜란드 공화국]]: 아드리안 포브(Adriaan Pauw, 1585 ~ 1653), 빌렘 리퍼다(Willem Ripperda, 1600 ~ 1669) *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Flag_of_Brandenburg-Prusia.png|width=28]] [[브란덴부르크-프로이센]]: 이사크 폴마르 * 그 밖에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의 여러 제후들의 대표자들 * 중재자 역 * [[파일:교황령 국기(754-1803).svg|width=28]] [[교황령]]: 파비오 키지(Fabio Chigi, 1599 ~ 1667)[* 후일에 교황 [[알렉산데르 7세]]] * [[파일:베네치아 공화국 국기.svg|width=28]] [[베네치아 공화국]]: 알비세 콘타리니(Alvise Contarini, 1597 ~ 1651)[* 같은 시기에 같은 이름이지만 관직이 달랐던 [[베네치아 도제]]가 있었다. 생몰은 1601 ~ 1684] * 기타 * [[스위스]]: 요한 루돌프 베트슈타인(Johann Rudolf Wettstein, 1594 ~ 1666) 협상은 [[1643년]]에 시작되어 [[1648년]] [[5월 15일]]과 [[10월 24일]] 신성 로마 제국 베스트팔렌 지방의 두 [[도시]], 오스나브뤼크와 뮌스터에서 체결되었다. 신교 측에 참전했지만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는 뮌스터에서, 개신교를 믿는 스웨덴 및 기타 개신교 제후들은 오스나브뤼크에서 가톨릭 연맹과 각각 평화조약을 체결했다. 참고로 가톨릭 연맹 측의 스페인이 뮌스터에서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스페인과 독립 전쟁을 벌이던 네덜란드는 개신교 국가였지만 뮌스터에서 조약을 체결했다. 왜 한곳에서 한꺼번에 처리를 하지 않고 두 군데에서 따로 체결되었냐면 스웨덴이 프랑스에 상석을 주고 그 밑에 들어가는 형태로 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는 점, 또한 양측이 공식적으로 연합하지 않고 각기 별개 주체로서 황제 측 진영과 싸웠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. 하필 그 도시였나 하면 뮌스터는 가톨릭교도가 대다수인 반면 오스나브뤼크는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가 각각 절반씩을 차지해서였다. 또한 이 두 도시는 전쟁에 직접 휩쓸리지 않아 대표단이 머무를 수 있을 만큼 식량 사정도 좋았다. 회담이 5년이나 걸릴 정도로 늘어진 까닭은 회담에 참석하는 대표들의 좌석 순서를 결정하고 [[의전]]을 규정하며 용어의 정의를 정하는 데만 6개월 이상 걸렸고, "[[육하원칙|누가 무엇 때문에 누구와 전쟁을 했는지]]"는 1년이 지나고서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등 첫 단추부터 문제가 생겼던데다, 게다가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투를 계속했기 때문에 회의장 밖에서 이긴 쪽이 회의장 안으로 와서 계속 요구조건을 올렸기 때문이다. 이 문제는 스웨덴과 프랑스가 결정적인 우세를 확립한 [[1646년]] 이후에야 대충 정리되었고,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를 해서 고작(?) 2년 만에 체결에 이르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